1.
여인의 향기.
워낙 유명한 영화이기에 대충은 어떤 영화인지 알고 있었다.
알 파치노의 환상적인 맹인 연기가 돋보인 명작.
그런데 사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기도 했다.
탱고를 주제로 한 맹인의 러브스토리.
그렇다. 나는 여인의 향기를 멜로물로 알고 있었다. 남녀의 사랑을 엮어주는 장치가 탱고인줄 알았다. 언젠가 지나가는 영상을 봤을 때, 그 낯익은 음악과 함께 알 파치노가 탱고를 추는 장면이 머리 깊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 이런 오해를 나만하고 있었나. 아무튼 알 파치노가 탱고를 추는 장면은 단 몇 분이 전부다. 하지만 탱고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장치라는 사실은 맞는듯 하다.
2.
영화는 알 파치노가 추수감사절 여행을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마지막 추수감사절이자 마지막 여행의 시작이다.
자살을 위해 떠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여행.
그리고 알 파치노의 보호인 아르바이트 중인 얌전한 고등학생 찰스는 거의 강제적으로 동행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여인의 향기는 알 파치노의 자살여행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알 파치노는 자살을 실패했는데 여기에 탱고의 원리가 작용했다. 알 파치노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탱고를 권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탱고는 실수할게 없어요.
인생과는 달리 단순하죠.
탱고는 정말 멋져요.
만약 실수를 하고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죠.
알 파치노의 자살을 극적으로 막으면서 찰리는 탱고를 언급하며 설득한다.
세상에 장님이 당신뿐이냐, 스텝이 엉키면 그게 탱고 아니냐고.
3.
알 파치노와 찰리의 여행은 흥미롭게 진행된다. 그들의 관계가 피보호자 대 보호자 에서 친구 대 친구 또 아버지 대 아들로 변해가기 때문이다. 처음에 찰리는 독단적인 알 파치노에 대한 반감으로 떠나려했지만 순간 고집불통이던 알 파치노가 조심스레 부탁을 한다.
부탁이니, 하루만 더 함께 있어줘
함께 하면서 알 파치노는 찰리의 무거운 마음을 눈치챈다. 찰리가 고민을 털어 놓으면서 둘은 어느새 친구가 되었고 점점 가까워진다. 다음 날 알 파치노는 찰리에게 순순히 떠나도 좋다고 말하지만 찰리는 거부한다.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알 파치노를 보며 떠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알 파치노는 그 때 처음으로 자신을 찰리의 아버지라고 언급한다.
4.
알 파치노는 장님이 된 퇴역한 장교이다. 성질이 무척 괴팍하고 독불장군에 권위적이며 직설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거친 모습 속에 뛰어난 직관력을 가졌고, 누구보다 섬세한 감성을 지녔으며, 내면을 잘 읽는 능력이 있었다. 또 사실 그는 시력을 잃음으로해서 자살을 염두에 둘만큼 큰 상실감에 빠져있었고 외롭고 상처 받은 한 인간이었다. 그 내면을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이라도 하듯 찰리를 조롱하기도 하며 귀청을 찢을듯한 호통을 치기도한다.
어른이 돼!
이렇게 찰리에게 소리를 지를 때는 내가 찔끔할 정도였다.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여린면을 그대로 노출하기도 한다.
난 장님이야....
내 말은 이제 누구도 내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거야....
5.
알 파치노가 제복을 차려입고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은 클라이맥스 중 하나다. 자살을 말리는 찰리에게 소리친다.
내가 죽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양심 때문일거라는 찰리의 대답에 알 파치노는 노골적으로 조롱한다. 아마도 군 진급실패와 퇴역과정에서 어떤 불미스런 일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네가 친구를 팔걸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
넌 내 맘을 아프게 해!
난 평생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맞서왔지!
그래야 내가 위대한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넌 그 반대야!
넌 성실해!
이러한 대사에서도 그러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또 영화 끝에서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바른길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너무 힘들기 때문에 뿌리쳤다는 고백이 나오기도 한다.
알 파치노는 자신의 자살을 지켜봐도 좋고, 가버려도 좋다고 한다. 그러면서 뒤이어 뜬끔없으면서도 찡한 대사가 이어진다.
내가 널 양자로 삼길 바라냐?
이 말 속에는 내가 너한테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 알 파치노는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찰리라는 아이가 자신의 자살을 진심으로 막으려 하다니. 사실 영화를 보면서 알 파치노가 자신이 맹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유별날 정도로 강했고, 워낙 당당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살에 이르는 순간 그는 더 솔직해졌다. 그는 절규하며 찰리에게 말한다.
난 생명이 없어!
난 어둠 속에 있단 말이야!
그리고 찰리에게 말한다. 자신이 살아야될 이유를 하나만 대보라고. 찰리는 두 가지를 대답한다.
탱고를 잘 추고, 페라리를 잘 몰았음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아마 이렇다.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시력을 가진 사람보다 더 잘 탱고를 추고, 더 잘 페라리를 몰았음을.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알 파치노는 쓸쓸하게 노래를 읊조리며 자살에 대한 결론을 암시한다.
어디론가 가고 싶은 그런 마음 없으셨나요....
하지만 아직 머물고 싶은 마음이시겠죠....
6.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알 파치노와 찰리.
하지만 찰리에게는 해결해야할 문제가 남아있다. 교장선생님을 골탕먹인 친구들이 누구인지 찰리가 목격했기 때문이다. 교장선생님은 자신의 추천을 받고 하버드대 장학생으로 입학할 것인지, 퇴학을 당할 것인지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찰리에게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이득을 위해 나머지 학생들이 퇴학당하는걸 차마 말할 수 없고, 입을 다물자니 자신만 퇴학을 당하게 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전교생 앞에서 교장선생님의 추궁이 시작됐다. 그 때 알 파치노가 들어와서 자신을 찰리의 부모 대리인으로 소개하고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는다. 교장선생님은 퇴학이라는 벌로 압박하지만 찰리는 끝내 친구들을 밝히지 않았다. 실망한 교장선생님은 찰스에게 은닉자이며 거짓말쟁이라고 말한 뒤, 퇴학조치로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밀고자는 아니죠!
이 말로 시작된 알 파치노의 변호는 열변을 토하며 계속 된다.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누구는 달아나고 누구는 남지요!
....
오늘 찰리의 침묵이 옳은지 그른지 판사가 아니니 모르겠지만,
그는 자기 장래를 위해서 누구도 팔지 않았소!
찰리에 대한 진심과 애정이 분출하는 장면이었다. 어둠 속에 버려진 인간으로 겉으로만 강했던 알 파치노가 타인의 마음을 치료하고 응원하는 인간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군인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대단한 집착은 시력을 잃은 상처를 감추기 위한 껍데기였다.
7.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
위험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
빠져 나가려는 사람.
알 파치노는 위험에 맞서 싸운 찰스를 지지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 과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또한 장님이라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찰스를 통해서 투영했을 것이다. 스텝이 엉키면 어떠리. 그게 탱고인걸.
8.
알 파치노의 연기,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한 배우가 영화 전체를 이끄는 소위 원톱영화에서 이렇게 부족함 없이 혼자서 꽉 채울 수 있는지 신기할 뿐이다. 런닝타임 내내 그의 행동반경은 걷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었던 것이 거의 전부였다. 즉 대사와 눈빛, 표정, 제스쳐만으로 영화를 꽉 채우고도 남았다는 말이다. 그가 아름다운 여인과 탱고를 추는 장면은 역시 명장면이었는데 다시 봤을 때는 그 감동이 배 이상이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명장면을 한, 두 개 꼽기는 어렵다.
찰리를 변호하는 장면, 페라리를 운전하는 장면, 자살을 시도하던 장면, 순간순간 무기력한 모습을 나타내는 장면들. 모든 장면에서 맹인 알 파치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페라리 운전 장면이 가슴에 남는다.
페라리를 몰 때의 쾌감.
페라리에서 내릴 때의 무기력감.
알 파치노의 이러한 감정변화에 휘청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9.
영화가 끝나고도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여인의 향기 인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다만 어설픈 생각으로는 이렇다.
시력을 잃은 나이든 퇴역장교 알 파치노가 자살기도를 접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과정에 탱고가 상징적인 역할을 했고, 그 탱고를 아름다운 여인과 추기까지 그 여인의 향기를 맞추며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 아닐까. 알 파치노는 남들만큼의 시력은 없지만 보통 사람은 인지하지 못하는 여인들의 향기를 맡는 능력이 뛰어나다.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본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의 내면을 본다는 뜻이다. 알 파치노에게 앞의 있는 여인이 온통 까맣게 보일지라도 향기로써 그 여인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수를 하고 스텝이 엉켰지만 그게 바로 탱고다, 라는 말의 의미인 것 같다. 따라서 여인의 향기가 중요한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부가 설명을 덧붙이자면 알 파치노가 여인의 향기에 대해 언급한 적은 세 번뿐이지만 그 시점은 절묘하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인 탱고가 시작할 때.
영화의 마지막에 알 파치노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직전.
묘하게도 이렇게 딱 시작-중간-끝에 여인의 향기가 등장한다.
이런 제 맘대로 해석을 알 파치노가 보고 혹시 이런 반응을 보이진 않겠지 ㅋㅎ
하!
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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