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화-/영화-

[데블스 에드버킷] Pressure. Desire. Next. (스포 주의)



1. 
1997년작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데블스 에드버킷》을 보았다. 
포스터만 보고는 알 파치노가 2000년대에 찍은 영화인줄 알았다. 
아무튼. 
알 파치노의 연기는 명불허전, 역시 말이 필요 없었다. 
그의 연기는 볼 때마다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어떻게 연기를 완벽하게 할 수 있을까.
그 때문인지 상대배우인 키아누 리브스의 연기력이 다소 떨어져 보이기까지 했다. 

2. 
알 파치노는 키아누 리브스를 영입하면서 한 가지가 걱정 된다고 말한다. 
"압박감 PRESSURE."
즉 압박감을 견딜 수 있겠느냐. 
"압박을 당하면 더욱 강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이들은 포기하지.
재능에 대한 압박감. 
시간에 대한 압박감." 


이 장면은 최근 나의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성환이형과의 결별. 
키아누 리브스가 알 파치노의 손을 잡는 순간, 
성공의 길로 들어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말로,
내가 성환이형과 계속 함께 한다는 것은, 
100%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100% 성장을 보장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결국 나는 스스로 성환이형의 손을 놓았다. 
일종의 압박감이었다. 
여러가지 압박감이었다. 
성환이형으로부터 생긴 압박감. 
내가 스스로로 만들어낸 압박감. 
나는 옳은 판단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했던걸까. 
알 파치노의 말처럼 포기한걸까. 
후회할걸 알면서도 결심한 일이지만, 더 후회를 불러일으키는 대목이었다. 

3. 
런닝타임 내내 전달 되는 메세지가 있다. 
바로 허영과 욕망이다. 

모든 일의 원인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허영과 욕망. 
아무도 부추기지 않았다.


키아누 리브스의 단란한 가정이 파괴되는 과정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알 파치노의 유혹.
키아누 리브스의 욕망.
하지만 결국 알 파치노의 유혹이라는 것 또한 욕망의 작용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악마의 유혹이라는 말이 있지만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욕구와 욕망에는 차이가 있다. 
욕구는 기본적으로 충족되길 바라는 것. 
욕망은 필요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 
욕망을 섣불리 나쁘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모든 불행의 시작은 욕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욕망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까. 

4. 
내가 이 영화에서 뽑은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다음'이다. 

키아누 리브스는 알 파치노에게 스카웃 됨으로써 부를 얻었다. 
또 더 높은 곳을 향한 발판도 제공 받게 된다. 
하지만 그럴 수록 점점 더 할 일이 많아지고, 아내에게도 소흘하게 된다. 
더욱이 아내의 건강이 갈 수록 악화되고 있고, 
키아누 리브스는 자신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사건을 진행하는 중이다. 
그 시점에 알 파치노는 키아누 리브스에게 제안을 한다. 
이해할테니 이번 일을 놓고, 아내를 돌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내가 자네를 필요로 하고, 자네도 그녀가 최우선이지 않느냐. 
그러나 키아누 리브스의 대답은 NO였다. 
이번 일을 놓치고, 다시 아내의 건강이 좋아지면 아내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 자신의 최우선은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다음에.... 아내에게 헌신할 것이다.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이 상황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히 맞딱드리게 되는 상황이다. 
당연히 나의 부모님, 나의 애인, 나의 친구가 최우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덜 중요한 것 때문에 뒤로 제쳐두거나 상처주고, 잊어버린다. 
그 이유는 '다음'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부모님에 소흘해도,  
지금 애인에게 상처줘도, 
지금 친구를 모른척해도, 
다음에 효도하고,
다음에 사랑하고, 
다음에 우정을 지키겠다고 생각한다. 

영하 속에서는 아내의 상태가 극도로 나빴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당연히 키아누 리브스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내가 드러나도록 건강이 나쁜 상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누구나 키아누 리브스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누군가 반문할 수 있다. 
중대한 일을 앞둔 상황에서 아내가 단순한 감기에 걸렸다면 그래도 아내를 돌봐야 하는가. 
나는 무조건 아내를 돌봐야 한다고 말하려는게 아니다.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경중을 판단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자는 취지이다.
일의 시급성, 아내의 가벼운 감기가 아닌,  
일 자체, 아내 자체(사랑)가 판단 기준이라는 것이다. 
평범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항상 진짜 최우선을 선택하며 살기란 역시 어렵다. 
우리는 '다음'이라는 시간에 너무 쉽게 의지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통의, 일반적인, 평범한 사람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위대한 사람의 경우는 다르지 않을까. 
그 사람들은 진짜 최우선을 선택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결국 위대해진 것은 아닐까. 
눈 앞에 훤히 보이는 이득을 포기하고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사람은 
보통 사람의 눈에 비이성적으로 비춰진다.  
안철수, 박경철, 오바마, 노무현 같은 사람들이 그런 부류일 것이다. 
그들은 부러운 삶이라기보다 소위 '멋있는 삶'의 표본이다. 
억 소리나는 자동차를 끌고, 수 백명평의 호화 저택에서 사는 사람들, 솔직히 부럽다. 
그렇지만 난 그들이 멋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부당한 권력에 바른 목소리를 내고, 행동으로 맞서는 사람.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함께 가는 사람. 
오히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멋있다' 라는 말이 나온다. 

역시 알 파치노가 주연한 《리쿠르트》에서 알 파치노의 대사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중요한 건 우리가 뭘 하는가야. 
우리가 누구냐보다 일이 우선이야.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결정한다.
We decide we are."

정체성에 대해 말을 꺼내기 위해 다른 영화의 대사를 인용해봤다. 
선택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나의 선택이 누적됨에 따라서 저절로 내가 누구인지 드러난다는 뜻이다. 
계속해서 '다음'을 담보로 지금 불효하고, 상처주는 선택을 해나간다면, 
결국 그 사람의 정체성은 불효자식이자 나쁜 사람이다. 
'다음'에 효자 혹은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할 때, 
그 사람은 그 '다음'이라는 시간에 지금과 또 똑같은 상황과 마주하게 될 것이고, 
그 때도 또 '다음'을 의지해 과거와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므로 
그 사람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바로 여기에 위대함에 이르는 한 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