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 죽음을 인생으로 치환해주는 버킷리스트
<버킷리스트>의 내용은 간단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두 노인, 에드워드(잭 니콜슨)와 카터(모건 프리먼)가
죽기 전에 꼭 하고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실현해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나한테 인생은,
나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있느냐는 거지.
- 카터
카터는 버킷리스트를 실현하기 위해 잠시 가족 곁을 떠났지만,
그 종착점은 가족에게로, 아내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 결국은 가족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었는데,
벌써 45년이나 지났네요.
- 카터
카터의 장남은 세무사, 막내 딸은 바이올린 연주자다.
부모님의 후원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직업이다.
카터는 평생을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며 자식농사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카터에게도 젊은 날이 있었고, 역사학자라는 젊은 날의 꿈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듯 꿈과는 다른 현실을 살아온 것이었다.
그렇게 45년이 흘렀다.
벌써 45년이 지나갔다.
나의 20대도 벌써 다 지나고 있네...
의사양반,
비키시오.
- 에드워드
의사가 에드워드에게 시한부 선고를 알리는 장면.
덤덤히 듣고 있던 에드워드는 그냥 TV나 가리지 말라고 대꾸한다.
이 대목에서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떠오른다.
소원을 말해보라는 알렉산더 왕에게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했던.
말나온 김에 다른 에피소드 하나 더 투척.
왕에게 아부하며 풍족하게 살아는 동료 철학자가 디오게네스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이 왕에게 봉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길거리에서 삻은 콩이나 먹으며 살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받아친다.
당신이 콩을 먹으며 사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왕에게 아부하며 살지 않아도 됐을 것이오.
역사는 알렉산더 왕을 정복자로 기억하지만,
속세의 모든 욕망을 정복한 디오게네스가 진정한 정복자 아닐까.
그런 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마주하고나서야 '정복자'의 길을 깨닫는다.
또 그런 면에서 일찍이 죽음을 통찰했던 스티브 잡스의 철학이 주목을 받는 것이고.
예전에 한 여론조사에서,
1,000명에게 언제 죽게될지 미리 알고 싶은지 물어봤었는데,
96%가 "노" 라고 했다.
난 항상 나머지 4% 쪽이었지만 말이다.
앞으로 얼마나 살게될지 미리 알면,
훨씬 더 자유로울거라 생각했었다.
이제보니 그게 아니다.
- 카터
내가 언제 죽게될지 미리 알면 어떨까?
생의 가장 중요한 정보가 될 수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분명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위의 스티브 잡스를 언급했는데,
그의 말이 우리 삶에 있어 더 큰 의미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곧 죽게 될 것이다' 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의사가 그랬잖소.
우린 몇 달 밖에 안 남았다고.
(어쩌면 한 일년정도...)
45년도 순식간이라면서?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본적 있소?
지금이 아니면 못 한단 말이오!
- 에드워드
어쩌면 '나중에' 라는 말은 주문이 아닐까?
우리 인생을 훌쩍 지나버리게 만드는 주문.
더 자주 반복할 수록 시간을 더 빨리 흘려보내는 주문.
긴 인생도 순식간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주문.
이 주문에 맞서는 또 하나의 주문은 '지금'이라는 말이 아닐까?
어때?
이게 바로 사는거야!
- 에드워드
첫 버킷리스트로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장면.
살면서 '이게 바로 사는거야!' 라는 말을 얼마나 하게 될까?
동시에 다른 대사도 떠올랐다.
먼저 <아드레날린 24>, 제이슨 스타뎀의 "I'm alive!!!"
그리고 <범죄와의 전쟁>, 하정우의 "살아있네."
살아있자.
생생하게.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에 대해 멋진 믿음이 있었다는거 아나?
영혼이 하늘에 가면말야, 신이 두 가지 질문을 했었대.
대답에 따라서 천국에 갈지 말지가 정해졌다지.
"인생의 기쁨을 찾았느냐?" 였어.
(찾았지.)
"자네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했나?"
- 카터
내 인생의 기쁨을 찾았는지.
내 인생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는지.
신곡, 읽어봤나?
단테의 신곡, 저승으로의 여행말야.
- 에드워드
버킷리스트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에드워드.
회의 도중 뜬금없이 <신곡>을 읽어봤는지 묻는 장면이다.
단테의 <신곡>말이다.
사실 난 이전까지 고전 제목 자체가 '단테의 신곡'인줄 알았다.
하지만 검색을 통해 '단테'는 작가 이름, '신곡'은 그의 작품임을 알게 됐다.
단테가 지옥에서 시작하여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는 순례길을 담고 있다.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으로 나눠져 있는데 에드워드는 지옥편을 언급했다.
왜 하필 지옥인가?
<신곡>에 등장하는 지옥에서는 강도와 살인보다 기만의 죄가 훨씬 더 무겁다.
그 중에서도 자기를 믿는 사람을 기만한 자들은 가장 중한 벌을 받는다.
에드워드는 여행 중 카터에게 자기 딸에 관한 일화를 털어 놓는다.
딸이 데려온 남자를 반대했지만, 둘은 결국 결혼했다.
그런데 이후 그 남편이 딸을 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딸에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고용해 죽지 않을 정도로 정리한 뒤 쫓아냈다.
신이 천국에서 안 받아준다 해도, 다시 하라면 분명 또 그렇게 할 거다.
이랬던 에드워드가 여행을 마치고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까?
자신의 행동이 '딸을 기만하고 딸의 기쁨을 빼앗은 건 아닌가' 하고 성찰하면서.
캔깡통
에드워드와 카터는 죽은 뒤, 캔깡통에 담겨 히말라야에 안착한다.
그 캔은 영화가 시작할 때, 카터가 재떨이로 사용하던 캔이었다.
또 그 캔은 에드워드가 즐겨마시던 '코피 루왁' 캔이었다.
자동차
카터가 입원했을 때, 손자가 열쇠고리를 선물했다.
카터가 늘 갖고 싶어했던 '셔비350' 모형이 달린 열쇠고리였다.
이후 에드워드와 레이싱할 때, 카터가 탔던 자동차가 바로 그 모델이었다.
(난 처음 볼 때, 그게 그 자동차인지 몰랐기에 (웃음))
씬 스틸러
두 배우가 지배하는 영화 속에서도 눈에 돋보였던 배우가 있었다.
초반부에 변론하는 장면, 후반부에 회의하는 장면, 두 씬에 나왔다.
바로 에드워드 회사의 변호사.
가만히 있어도 익살이 넘치는 잭 니콜슨 바로 옆에서도,
그의 익살이 빛을 발하는 게 놀라웠다. (웃음)
영화는 잘 봤지만, 웰메이드는 아니다.
'버킷리스트'가 한 번 살렸고,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또 한 번 살린 영화다.
즉 '실패하기 힘든 소재'와 '성공을 보장하는 두 배우의 연기력'이 살린 영화다.
'씨네21'에서 발견한 'gracias09' 님의 촌철살인 댓글이다.
영화는 두 베테랑에 기대고, 버킷리스트는 돈에 기대고
이 영화의 의미는 관객들이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도록 만드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버킷리스트는 어떻게 작성해야 할까?
'버킷리스트'는 '죽음'을 전제하고, 인식하고, 수용한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버킷리스트는 살아있는 동안 하고 싶은 일인 동시에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버킷리스트는 죽음에 대해 충분히 염두하고 작성해야 한다.
어쩌면 버킷리스트는
무겁고, 막연하고, 두려운 죽음을
가볍고, 간단하고, 즐거운 인생으로 치환해주는
마법의 장치가 아닐까?
목사님이,
우리 삶이란,
같은 강으로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거라고 하시더군.
앞에 무엇이 놓여있건 말야.
안개던지, 폭포던지 말이지.
인생의 기쁨을 찾아가게나.
친구, 눈을 감아보게.
그리고 물결 따라 흘러가게나.
- 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