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차] 내 생에 가장 충격적인 칭찬
며칠 전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괜한 짓 한 건 아닌지 후회가 밀려온다.
첫 시간 오티도 못 간 터라 더 초조하다.
난 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이렇게 망설일까.
결국 오늘 9/11, 나에게 첫 연극수업이 시작됐다.
서울캠퍼스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304관은 전혀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외관 또한 마치 비밀의 동굴 같았다.
강의실에 입장.
몇몇 학생들이 겸연쩍게 인사했다.
나도 그들에게 겸연쩍게 인사했다.
교수님이 오실 동안 가만히 앉아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차림새였다.
한 쪽 벽면이 거울로 뒤엎여 있었고, 매끈한 나무 바닥이 깔려 있었다.
사람도, 공간도 참 낯설었다.
아아.. 너무 뻘쭘해. 괜히 왔나.
김소희 교수님이 오셨다.
우려와는 달리 첫 인상이 유(柔)하셨다.
타학과 학생이라 미운 오리 취급받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수업 시작]
1. 각자 몸풀기
2. 단체 몸풀기
3. 수업에 대한 설명
4. 연기와 화술에 대한 설명
5. 대본 리딩
6. 피드백
1. 각자 몸풀기
안 그래도 어색한데 움직이긴 해야겠고 뻘쭘했다.
군중 속의 고독. ㅜㅜ
2. 단체 몸풀기
교수님 지도 하에 놀이하듯이 진행됐다.
예전에 <액션가면>에서 '기초 연기반' 다닐 때도 그랬는데, 이 시간이 너무 재밌다.
3. 수업에 대한 설명
<영혼과 물질>(이윤택 저)을 읽고 기말 레포트를 제출한다.
형식은 자유, 기간은 11월 말까지.
자신의 대한 생각, 연기에 대한 생각 등을 담아서 쓰면된다.
목차 1부는 반드시 읽고 넘어갈 것.
이번 주 숙제는 평상시 자기 목소리를 그냥 듣고 관찰해보기.
4. 연기와 화술에 대한 설명
- 배우는 그냥 상상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한다.
- 배우는 밀림 속 언제 사자에게 잡아먹힐지 모르는 상태로 있어야 한다.
절대로 퍼져있어서는 안 된다.
하체는 언제든지 튀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반면 상체는 자유자재로 통제가 될 만큼 부드럽고 자유로워야 한다.
단 뒤쪽(척추와 목)은 중심을 잡아주어야 한다.
기준점이 되어야 한다.
- 연기는 왜 하는 걸까?
연기는 정말 비실용적이다.
다른 말로 연기는 절대 쉬운 길이 아니고, 배우의 길 역시 마찬가지다.
- 내가 갖고 싶은 자유는 수없이 그 자유가 희생되어야만 한다.
김연아가 얼음판 위에서 자유롭게 공중 3회전을 할 수 있기까지,
수없이 많은 자유의 희생이 뒤따랐다.
- 배우의 피라미드가 있다고 치자.
현재보다 한 단계 높이 오르기 위해서 필요한 그 무언가를 깨달아야 한다.
노력은 말할 것도 없다.
- 배우는 수많은 영혼을 담아야 하는 물질이다.
배우의 몸이 잘 준비돼 있어야만 온전히 영혼을 담아낼 수 있다.
- 대본을 받을 때, 배우는 어떤 태도여야 할까?
귀 기울여라.
이 대본이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지 잘 들어라.
(난 이렇게 답하고 싶었다.
대본은 요리 재료를 받는 것과 같다.
주어진 재료로 나는 어떻게 요리를 할 것인지 생각하는 게 대본을 받을 때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 배우는 미쳐야 하되,
자기가 어디까지 미쳐있고 관객에게는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까지 동시에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내가 배우 하정우를 보며 생각했던 점이었다.
마치 하정우는 자신이 이렇게 연기했을 때, 관객이 어떻게 느낄지 완벽하게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는 느낌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기분을 완전히 구체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듯 했다.
하배우, 느낌 있다.)
5. 대본 리딩
마른침이 꿀꺽꿀꺽 넘어갔다.
교수님이 한 명, 한 명 지목해서 읽어나갈 때마다 긴장은 쌓여갔다.
대부분 역시 잘했다.
그럴 수록 압박은 더했다.
드디어 나를 지목하셨다.
몰입해보려고 애쓰긴 했는데 읽기에 급급했다.
그러다보니 목소리가 떨리고 빨라졌다.
'아, 엉망이다'
다 읽고나서 든 생각이다.
6. 피드백
교수님이 한 명, 한 명 전부 피드백을 해주셨다.
그런데 나에 대한 피드백을 듣는 순간 너무 놀라 눈과 입이 똥그래졌다.
몸둘바를 모르겠어서 몸이 달아올랐다.
- 지금 배우를 준비해도 될 만큼 좋았다.
- 호흡이 조금 떠있긴 했지만, 톤이나 발음이 듣는 사람 입장에서 귀에 들어오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 연구개가 열려있다. 배우가 되는 위해 고쳐야 하는 습관을 갖고 살지 않았다.
- 좋은 타학과 학생이 들어오면 여러분에게도 자극이 돼서 좋다.
단언컨대, 이 말은 내 생에 가장 충격적인 칭찬이었다.
나는 평소 칭찬에 둔감한데, 이번엔 너무 놀랐다.
내 예상은 이랬다.
'처음이라 많이 긴장했나 보구나' 혹은 '긴장했을텐데 그래도 잘했다' 등.
내 리딩이 너무 부족해서 그저 짧은 코멘트만 하고 넘기실 줄 알았다.
게다가 난 평소에 내 '입'에 관해 강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 목소리, 발성, 발음, 톤, 호흡 등 전부 거슬려 했고, 말도 정말 너무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디테일 하고도 폭포수 같은 반전 칭찬을 해주신 거다.
수업이 끝나고도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교수님의 칭찬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왜 그렇게까지 칭찬을 해주셨을까?
나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말 좋은 이 기분을 그냥 느끼기로 했다.
춤추는 고래가 되기로 했다.
내 생에 최고의 칭찬을 즐기기로 했다.
* 교수님의 강의를 모두 담지는 못했다.
* 소녀시대 수영이 이 수업을 듣는다!!
대본 리딩할 때, 덜덜덜 거렸던 게 계속 생각이 났다.
동시에 나와는 대조적으로 상당히 안정적인 리딩을 보여준 수영이 떠올랐다.
물론 다른 학생들도 잘했는데, 안정감 측면에서는 수영이 단연 눈에 띄었다.
수 년간 수 만의 관객 앞에 서 본 경험, 치열한 방송현장에서의 경험.
그런 수영에게 오늘 대본 리딩은 간단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단 몇 명을 앞에 두고서도 심장이 뽜운스 뽜운스 거리는 나란 남자와는 다르게.. ㅜㅜ
나도 마치 그런 경험이 있는양 마인드컨트롤 할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