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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 예술가들은 자기 삶을 산다.

봄엔꽃을 2010. 9. 14. 01:42

권력의 시녀로 살아가기 보다는 벌어먹을 지언정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낫다. 

영화 《타인의 삶》을 보고 문득 든 생각이다. 벌어먹으면서 사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를 준 것 뿐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빨갱이'를 감시하고 색출하는 권력집단(정부)의 고위 간부와 그에 대항하는 무리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인 슈타지의 고위 간부 '비즐러'는 반국가세력 중 유력한 인물인 예술가 '라즐러'의 삶을 도청하고 철저히 감시한다. 비즐러는 그 예술가의 삶을 알아가면서 점점 그의 삶과 사랑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위험을 무릅쓴채 급기야 그의 인생을 보호하기에 이른다. 

독재적인 권력집단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얼만큼 비인간적일 수 있는지는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집단의 파렴치함과 부도덕함이 아니다. 바로 삶의 건조함이다. 영혼의 메마름이다. 

즉 인간에게 있어 인간 그 자체를 가장 숭고하게 여기지 않을 때 오는 비극이다. 권력이 인간 위에 있는 세상,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에게만 찾아오는 비극이다. 

비즐러는 돈으로 여자를 사고 짧은 시간의 쾌락을 얻는다. 그에 반해 라즐러의 삶 속에는 '모든걸 바쳐 사랑한' 여자가 등장한다. 비즐러의 삶은 나보다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쁘게 표현하면 자신 위에 있는 거대한 권력을 유지시키는 작은 톱니바퀴 역할을 하며 사는 것이다. 좀 더 큰 톱니바퀴가 되기 위해. 그에 반해 라즐러의 삶에는 신념과 이상 그리고 가치가 있었다.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사랑이 있었다. 

비즐러와 라즐러 중 누가 더 '인간다운 삶'인가? 비즐러는 권력을 위해 '살아주고' 있었고, 라즐러는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라즐러는 곧 인간을 위한 삶이었다. 그의 위에도 아래도 아닌 그 옆에 인간이 있었다. 그에게 인간은 누구보다 더 귀하거나 덜 귀한 존재일 수 없다. 그 속에서 인간은 인간다워 진다고 생각한다. 

비즐러의 삶에는 그에게 빌빌 거리는 아랫사람이 있었고, 벌벌 떠는 주변사람이 있었다. 라즐러에게는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고,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과연 무엇이 더 인간적인 삶의 모습인가? 인간적인 모습으로 살 수록 우리 삶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의미를 주는 것 같다. 

내 손에 권력을 쥐고 있으면 삶이 행복할까? 편하긴 하겠다. 수월하긴 하겠다. 그런데 그 다음이 없어 보인다. 

내 곁에 우정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삶이 행복할까? 근근히 세 끼 먹으면서, 노후를 대비할 돈이 없어도 그 때도 행복할까? 

판단이 생기는 것 같다. 

요즘 내 머릿속에 온통 퍼져있는 생각은 내가 주체적으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불행하다. 
행복해지고 싶다. 

지금 나를 감싼 환경과 그 안에서 만들어진 관계로 인해 내 삶이 자유롭지 못하다. 
이 관계를 단절시키고, 이 환경을 벗어나면 나는 자유로울까? 행복할까?
도피가 너무 이상적이라면, 나는 대신 완전히 탈바꿈 하고 싶다. 
지금 내 모습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무엇인가? 

얼마 전, '꺄르르♡인'님이 나의 우울한 심정을 듣고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예전에 마찬가지 상황이었을 때) 그래도 저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끈을 놓치 않았던 것 같아요."

나도 그렇다. 
지금 무척이나 울적하고, 우울하고, 침울하고, 쓸쓸하고 식어있지만 행복해지고 싶다. 
더 지치기 전에.